When Breath Becomes Air

 

오랜만에 책 이야기.

작년 언젠가 교보문고를 한 바퀴 돌고 있었다. 핀터레스트의 북 커버 핀에서 볼 법한 트렌디하고 예쁜 책이 있어서 표지를 읽어보았다. <숨결이 바람될 때>. 어딘가 모르게 과하게 서정적이라 느껴졌고 딱히 흥미를 끄는 제목도 아니어서 그대로 표지를 열어보지도 않고 책을 지나쳐왔다. 그리고 이 책을 다시 보게된건, 며칠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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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산 책의 커버

광화문 교보의 영어 서적 코너에 있다가 낯익은 표지가 눈에 띄었다. 제목을 잊은건 아니었지만 책 디자인만큼 인상적이었던 것은 아니라서 “When Breath Becomes Air” 라는 제목이 새삼 새롭게 보였다. 아, 몇 달 전 보았던 그 책의 원서구나. 숨이 공기가 될 때… 호흡과 명상에 관련된 책인가? 하고 생각하며 책을 집어들자 애인이 말했다. 감동적인 책이라고. 읽어봤으면 한다고.

애인이이 오키나와 가있는 동안 읽기 시작해서 지금 마지막 장을 덮기 직전까지 와있다. 원서를 읽는 것의 장점이자 단점인 시간이 존나 오래걸린다는 것이다. 의학용어도 많이 나와서 사전찾느라 귀찮았지만 오래도록 폴과 함께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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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Jakarta Post

 

나는 몰랐지만 사실 이 책은 정말 유명한 책이었다. 나는 책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모른채 읽었기에 한 장 한 장 넘길때마다 충격과 슬픔의 연속이었다. 만약 내가 번역판을 샀다면 책을 사려고 알라딘을 켜서 구매까지 오는 와중에 줄거리를 이미 다 알아버렸을 것이다. 알라딘에 책 제목을 입력하면 “서른여섯 젊은 의사의 마지막 기록” 이라고 그냥 바로 책 내용이 나와버린다. 어떤 사람에게는 구매 포인트가 될 수도 있겠지만 나는 모르고 읽는 편이 나았다.

폴 칼라니티는 스탠포드에서 영문학을, 캠브릿지에서 철학(HPS)을 그리고 예일에서 의학을 수학하고 의사가 되었다. 그가 범인이 아니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선택을 할 수 있는 환경이 신기했다. 흔히 말하는 문과 코스에서 의예과로 점프하는 것은 좀 상상하기 힘들다. 그만큼 여기의 교육이 문이과로 이분화 되어있는거겠지. 그가 이렇게 특이한 이력을 갖게된 까닭은 생물학, 도덕, 문학, 철학이 교차하는 곳이 어디인지 고민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가장 피하려고 했던 분야, 의예과에서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의사 가족에서 자란 그는 의사만큼은 되고싶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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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민 <신과 함께>

 

병원에서 사투를 벌이던 폴의 모습에서 만화 <신과 함께> 가 떠오르기도 했다. 폴은 의대생 시절을 회고하며 죽음 앞에서 생각보다 엄숙하지 않은 동급생들의 모습을 묘사하기도 하고, 의사라고 늘 사명감 속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말했다. 본인도 다르지 않은듯 썼지만 폴은 늘 진지한 학생이었다. 오늘의 업무를 확인하며 ‘아 오늘 죽은 사람은 몇 명이네~’ 하며 그냥 저승까지 데려다주는 사신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신은 규칙을 어겨가며 원한을 풀어주려고 하고, 혹은 올 때가 아니라며 되돌려보내기도 한다. 책에서 본 폴의 모습은 그런 사신의 모습이었다.설령 아무런 손 쓸 방도가 없더라도, 환자 앞에 다가온 죽음을 밀어내보려고 하는 것이 느껴졌다. 침착하면서 냉철하게 쓰여있었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 죽음이 환자가 아닌, 자기 앞에 다가온 사실을 마주해야할 때는, 참, 아.

“우리는 엄청난 투쟁과 고통을 딛고 이 세상에 오지만, 세상을 떠나는 일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 구절 바로 뒤에, 폴의 산부인과 실습 이야기가 나온다. 투쟁과 고통을 딛은 생명이 바로 사그러지기도 하는 그 자리. 본인의 죽음 앞에서 자신이 겪어온 숱한 죽음들을 정리하는 과정이 상상되면서 경외심이 느껴졌다. 사실 남이 죽는 것도 슬프지만 내가 죽는 것은 슬픔 이상이다. 무서울 것이다. 두려울 것이다. 무슨 짓을 해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그 공포가 아득하지만 잠시 망각하는 수밖에는 견딜 방법이 없다. 폴이 덤덤하게 써나간 자신의 이야기들 속에 머물러 있다보면 이 명석한 학생이 곧 죽는다는 사실을 잊게된다. 그러다 문득 문득 튀어나오는 죽음의 신호들을 마주하면 함께 두려워지고, 울게되었다.

책은 루시의 이야기로 마무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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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Kalanithi and Lucy Kalanithi

이 책은 폴의 아내, 루시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루시 또한 촉망받는 젊은 의사였다. 10여 년을 병원에서 보낸 그들에게 이제 막 여유가 찾아오려던 참이었다. 전 세계 유수의 의대들이 부부를 동시에 교수로 초빙하고 싶어했고 그들은 이제, 그 제안들을 받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인생을 걸어 열망하던 것을 마침내 쥐게 될 순간이 눈 앞에 있는데 잡지 못했다. 폴은 심지어 폴의 이야기도 다 끝내지 못했고 루시가 그의 이야기를 정리해야했다. 루시는 미완성으로 끝난 이 책이야말로 폴이 직면했던 현실의 본질이라 말한다. 모자란 시간과 싸우는 절박함과 동시에 그 사투 속에서 전하고 싶었던 이야기, 그리고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을 마주하기. 이 책은 죽음을 선정적으로 그리지 않는다, 내가 인생 살아보니 이렇더라 하며 훈시하지도 않는다. 다만 그들 앞에 놓여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의사의 언어로, 철학자의 언어로, 문학가의 언어로 이야기 할 뿐.

루시는 폴이 건강에 이상을 느낄 때, 외면할 때, 견딜 때 그리고 떠날 때까지 함께있었다. 아니 함께 있어야했다. 어쩌면 나는 저자 폴 보다는 루시에게 감정 이입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괴로워하는 폴을 볼 때면 아픔을 겪는 사람이 아닌 아픔을 지켜보는 사람이 되어 마음이 아팠다. 죽고싶지 않다는 남편의 말에 눈물 말고 위로를 건네야했고 와줌에 담보대출을 이자가 낮은 곳으로 바꿔야했으며 혼자 딸도 키워야했다. 루시 역시 수많은 죽음을 목도하는 사람이지만 30대의 죽음은 드물었다. 힘들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더 힘든 사람을 위해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서 또 힘이 되어주어야했다. 루시가 폴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리고 얼마나 존경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정말로 함께 헤쳐나갔다. 나중에 폴의 무덤을 묘사하는 부분은 의연하다못해 웃음이 나기까지했다. 루시는 종종 신혼여행 때 마셨던 와인을 그의 무덤에 뿌리며, 무덤에 자란 풀을 그의 머리카락을 만지듯 쓸어 인사하곤 한다. 견딜 수 없는 슬픔이라 생각했지만 견디고 있으며, 그가 떠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줄 알았지만 똑같이 그의 사랑과 감사를 느낀다. 루시는 C. S. 루이스의 말처럼 사별은 부부애의 중단이 아니라 신혼여행과 같이 결혼의 과정 중 하나라고 여긴다고 한다.

 

 

 

평생 죽음에 대해 고민했던 폴은 자신이 죽음을 진실하게 마주할 수 있을지에 대해 깊이 고민했다. 그리고 해냈다. 그의 아내이자 목격자 루시가 말했다.

폴이 떠나고 이틀 뒤, 루시는 딸에게 편지를 썼다. “누군가 죽으면 사람들은 그 사람을 좋게 이야기하려는 경향이 있어. 하지만 사람들이 아빠에 대해 칭찬하는 이야기들은 모두 진실이란다. 아빠는 정말 그렇게 훌륭하고 용감한 사람이었어.”

이상한 정상 가족

TV를 보다보면, “내 딸은 저런놈에게 시집 안 보내” 라 말하는 아버지를 종종 볼 수 있다. 딸이 좀 더 멋지고, 조금 더 괜찮은 사람과 결혼하길 바라는 아버지들의 비장한 염원. 아마 딸 가진 아버지라면 미래 사위는 어때야 한다는 조건이 최소 열 가지 정도는 될것이다. 흔한 레파토리는 아니지만, 미혼인 딸의 임신 소식을 듣고 서둘러 애 아버지를 찾아 결혼시키려는 아버지 또한 종종 볼 수 있다. 이 아버지의 경우도 아마 나름의 미래 사위 조건 리스트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딸이 결혼 전에 임신해버리면 그 리스트는 소용없다. 일단 결혼이 중요하다.

‘결혼’으로 이루어진 엄마와 아빠, 그리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 이게 우리가 생각하는 ‘정상 가족’의 모습이다. 하나라도 없거나, 더해진다면 바로 ‘이상’해진다. 위의 이야기처럼 결혼하지 않은 딸이 임신을 하는 경우도 그렇다. 부모는 정상 가족의 일탈자인 딸을 어서 정상 가족 안에서 출산할 수 있도록 결혼을 서두른다. 우리 딸이 행복한 결혼 생활을 했으면 하고 아주 오래 전부터 생각해둔 미래 사위 자격 리스트보다 더 중요한 것, 바로 정상 가족.

<이상한 정상가족>은 ‘정상 가족’ 주위에서 벌어지는 비정상적인 모습들을 말해주는 책이다. 한 장 한 장이 외면할 수 없는 비극적인 사건들로 가득차있다. 어디가 병들었다고 말하기 힘들정도로 곳곳이 다치고 멍든 가족주의 사회의 모습을 보여준다.

대한민국에서 나고 자란 누구나, 이 책 어딘가에 교집합이 있다

아동 학대에 찬성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체벌의 경우 의견이 분분하다. “적절한 체벌은 필요하다” 라는 모호하지만 확고한 신념부터, “엉덩이는 괜찮다” 라던지 “전용 회초리가 있으면 괜찮다” 등 꽤나 구체적인 체벌 방안까지 갖춘 의견들이 나온다. 각자 학대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을만한 체벌에 대한 기준을 세우고 아이를 때리는 행위를 훈육이라 혹은 사랑이라 부른다.

책에서는 세계 최초로 체벌 금지법이 정해진 스웨덴에서의 일화를 소개한다.

아동문학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은 스웨덴에서 부모의 체벌을 금지하는 법이 통과되기 1년전인 1987년, 독일 도서협회가 주는 평화상을 타면서 ‘폭력에 반대합니다 Never Violence’ 라는 제목의 연설을 했다. … 아이들이 직접 회초리를 가져오게 하고 몇 대 맞을지도 결정하라고 함으로써 “네 죄를 네가 알렷다” 와 같은 경고와 함께 스스로 반성할 기회도 갖도록 한다는 방식 같은 것 말이다. 그런데 이 소년은 회초리를 찾으러 나갔다가 한참 만에 울면서 돌아와 작은 돌을 내밀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회초리로 쓸 만한 나뭇가지를 찾을 수 없었어요. 대신에 이 돌을 저한테 던지세요”

<이상한 정상가족> 중에서

체벌을 하는 어른은 아이가 견딜 수 있을만한 육체적 고통을 통해 잘못을 깨닫고 학습하길 바란다. 하지만 당사자인 아이가 기억하는 것은 그렇지 않다. 위 일화의 아이는 부모가 자신을 내보낸 이유를 “나를 아프게할 물건을 찾아오게 하기위함”이라고 생각했다. 체벌은 어른들의 생각만큼 훈육의 효과가 있지 않다.

이 책의 첫 장 <‘내 것인 너’를 위한 친밀한 폭력, 체벌>을 열었을 때, 나는 자연스레 어린시절을 떠올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어이없을 정도로 맞으며 자랐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내가 맞을 짓을 했어” 또는 “그 땐 다 그렇게 맞으며 자랐어”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어떤 체벌도 용인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내가 스스로 이런 생각을 했다는것에 놀랐다. 세상에 맞을 짓이 어디있고 맞아도 되는 때가 어디있나. 아무도 이런 말을 해주지 않았던 나의 어린 시절이 가여웠다.

이 책의 저자인 김희경 작가는 세이브더칠드런, 인권정책연구소 등에서 근무하면서 겪은 안타까운 사건들을 소개한다. 너무 많은 위험에 당연하게 노출되어있는 아이들이 너무 많다. 언론에 노출되는 자극적이면서도 무감각한 보도로 인해 아동 학대를 바라보는 시각이 너무나 좁아져있다. 아이를 죽을때까지 때리는 것 만이 학대가 아니다. 학대는 계모만 하는 것이 아니다. 학대는 정상 가족 밖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아이를 아이로서 사랑하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인권의식을 마비된 채 내버려두고 있고 외면하고있다. 이 책은 그 것을 깨운다. 체벌로 시작해서 과보호와 방임까지 이 모든 것이 학대가 될 수 있음을 상기시킨다. “일가족 동반자살”이라는 다소 건조한 단어 뒤에 어린이 살해가 숨겨져 있음을, “친권”이라는 따뜻한 단어 뒤에 자식을 부모의 소유로 보는 합의가 있다고 알려준다.

미혼모는 있지만 미혼부는 없다

임신은 혼자 할 수 없다. 굳이 설명하기도 귀찮은 자명한 사실이지만 우리나라의 법과 정의의 심판은 이 사실을 잘 모르는듯 하다. 우리나라 현행법상 임신을 하면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상황이 와도 낳아야한다. 아이를 낳았는데 키울 수 없는 상황이 와도 키워야한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처벌을 받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처벌의 대상은 여성뿐이다. 시대를 역행하고 있는 “낙태죄”가 그러하고, 아기를 낳아 유기하는 엄마는 처벌하지만 아빠는 알바아닌 “영아유기죄”가 또한 그러하다. 아이는 남녀가 함께 있어야만 만들 수 있는데, 왜 여성에게만 모든 책임이 전가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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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해외 입양 아동의 40% 를 담당하는 ‘고아수출국’ 이다

낳기 전엔 소중한 생명이라며 인공임신중절을 죄로 규정하는 이 사회는 막상 아이를 낳고 나면 아무런 관심이 없다. 미혼모의 경우는 더 심각하다. 사회적으로는 물론 법적으로도 차별받는다. 이쯤되면 ‘정상 가족’ 안에서만 허락된 출산을 감히 어긴 벌이 아닌가하는 생각이든다. 임신했다고 학교에 못 나오게 하는 선생님, 낙태나 입양을 강요하는 엄마, 어떤 놈인지 모르지만 일단 결혼 시키려는 아빠가 우리 주변의 어른들의 모습이다. 김희경 작가가 주목한 저출산의 주요한 원인 하나가 바로 혼외출산이다. 미혼모는 부도덕하다는 편견이 미혼모를 평범한 엄마로 자립할 수 없게 만든다고 한다. 생각해보니 미혼모라는 표현도 이상하다. 결혼을 했던 이혼을 했던 미혼이건 비혼이건 엄마는 엄마인데.

이 책의 후반부는 국가가 ‘정상 가족’에 대한 이미지를 주입시키며 자행해온 일들과 그 부작용이 낳은 정상인듯 정상아닌 정상같은 가족의 모습에 대해 보여준다. 시대별로 입맛따라 달라지는 핵가족을 바라보는 관점의 이데올로기와, 국가의 책임을 가족에게 떠넘기는 뻔뻔한 정책들이 개인이 아닌 가족 단위의 경쟁구도를 만들어왔다. 값싼 저임금 노동력이 필요했던 국가는 핵가족을 찬양하며 농촌 자녀의 도시 이주를 장려하고, 여성의 노동시장 유인을 외쳤다. 하지만 산업화가 진전되며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자 노인 부양의 필요성을 자식들에게 떠넘겼다. 부모고 뭐고 농촌 탈출해서 서울로 와서 일하라더니 갑자기 아들 딸들에게 전통적 가족 부양의 의무를 지우면서 국가는 아무런 사회적 비용을 치르지 않았다.  살인적인 도심의 집값과 오르지 않는 임금 속에서 N포 세대 자녀의 생계까지 책임져야하는 세대에게 이제는 부모 봉양의 의무가 더해졌다. 전통적 가족의 해체를 부르짖을땐 언제고 이제와서 이게 원래 우리의 전통이라며 부모까지 책임지라니. 부모를 실버타운이나 요양센터에 보내면 그 비용을 자식이 모두 부담함에도 불구하고 고려장 취급하는 경우 또한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다. 이 또한 감히 전통 규범을 벗어난 벌과 같은 비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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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 가족의 이탈자들 뿐만 아니라 엄마, 아빠 그리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로 이루어진 정상 가족도 잔뜩 병들어있다. 우리 아빠 또한 70-80년대에 여자 형제들의 희생으로 공부했다. 결혼 후 누이들과 어머니에 대한 부채감을 엄마에게 나눠주었다. 이 비극은 꽤나 오랫동안 이어졌다. 우리 엄마는 어렸을 때는 공부해야하는 오빠 뒷바라지를 했고 결혼해서는 남편과 자식과 시부모 뒷바라지를 했다. 아빠의 부채청산에 감정노동까지 해왔다. 엄마도 아빠도 본인들의 인생 없이 이 가족 단위 경쟁체제에서 희생하며 살았다. 이 희생적인 모습이 너무나 흔해 모두가 어디가 아픈지도 모른채 지내왔다. 책을 덮으니 병을 당장 고치기는 어려워도 어디가 아픈지는 알 수 있었다. 이제는 나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에게도 말해주고 싶다. 우리 아프다고. 이제 치료하자고.

 

덧1. 이 글을 쓰는 도중 김희경 작가가 문체부 차관보에 임명되었다.
덧2. 이 글을 쓰는 도중 e-Book이 출간되었다.